함석헌시인이 직접 번역한 서풍에 부치는 노래
1
오, 사나운 서풍아, 너 가을 산 숨이야,
네가 볼수 없이 올 때 그 앞에 몰리는 시든 잎새
술사(術師)에게 쫓기는 유령의 떼와 같으니
누르끔, 꺼무스름, 헤멀금, 불그스름,
염병맞은 무리처럼 도망치는 것들이로구나,
오, 너 날리는 씨알들을 몰아내는 놈아,
네가 그들을 캄캄한 겨울 이불 속에 몰아 넣으면,
거기서 그들은 차디찬 주검인 듯 깊이 누워 있다가
마침내 새 맑은 너의 봄 누나가 찾아와, 피리를 불어
싱싱한 새 싹을 대기 속에 떼지어 먹일 때,
꿈꾸던 대지의 들과 언덕은
생명의 빛과 향기로 넘쳐 흐르는구나.
사나운 영(靈)아, 안 가는 데가 없는 놈아,
들부수면서 또 간수하는 놈아, 들으라, 오, 들으라!
2
아, 네 흐름 위에는 무서운 하늘의 흔들림 속에,
쏟아지는 거친 구름이 낙엽과도 같으니,
너는 하늘과 바다의 얼크러진 가지에서
비와 번개의 사지들을 흔들어 떨어졌구나,
형상없는 네 큰 물결이 푸른 물낯 위에는
미쳐 돌아가는 미내드의 머리에 뻗쳐 번쩍이는 터럭같이
그와 같이, 아득한 지평선의 저 끝에서부터
높은 하늘의 천장에까지 치닿아,
몰아치는 폭풍우의 머리칼 같이 흐트러졌구나,
너, 숨지려는 이 해의 구슬픈 노래야,
숨막히는 이 밤은 휘넓은 그 무덤의 천장이라,
너는 증기의 엉킨 힘으로 이를 버티었구나,
그 빽빽한 기압 속으로부터는
캄캄한 비, 번개, 우박이 쏟아지고야 말겠구나, 오 들으라!
3
너는, 푸른 지중해를 흔들어
그 여름 날 긴 꿈에서 깨운 놈아,
수정 같은 흐름의 돌아드는 노래를 들으며,
빠이이 포구의 부석도(浮石島)를 의지하고 그는 잠이 들었어라,
푸른 이끼 향기로운 꽃이 한데 우거져,
보는 눈도 어지러워 못견딜 듯 현란스러운,
날뛰는 물결대로 어지러이 흔들리는,
옛 궁성과 탑 그림자처럼 꿈 속에 보며!
야, 네 오는 길 열기 위하여
평탄한 대서양은 갈라져 벼랑처럼 일어서고,
저 밑에는 바다의 꽃, 또 해도류들의
생기없이 흐느적이는 잎새조차도
네 소리를 알아듣고 갑자기 낯빛을 변하고
무서워 떨며 넋을 잃는구나, 오, 들으라!
4
내 만일 마른 잎새이어서 너를 탈 수 있었더라면,
내 만일 흐르는 구름이어서 너와 같이 날릴 수가 있었더라면,
네 힘 밑에 불리는 대로 날뛰는 물결이어서,
그 힘찬 천성(天性)을 나누어 너만은 못하더라도
자유로울 수 있었더라면, 아, 이 억제할 수 없는 놈아!
또 그렇지 않으면 내 일찍이 어렸을 때와 같이
너의 짝이 되어 하늘가에 헤맬 수라도 있었더라면,
푸른 공중에 달음치는 너의 걸음을 따라서 넘는 것이
공상으로는 아니 뵈던 그때가 될 수 있었더라면,
내가 이처럼 속이 타 너와 다투어가며 기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을,
오, 나를 일으키렴아, 물결처럼, 잎새처럼, 구름처럼!
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어졌노라! 피를 흘리노라!
너처럼 그렇게 억세고, 날쌔고, 자부하는 놈을,
이 인생의 무거운 짐이 얽매고 머리를 굽게 하였구나.
5
나를 네 거문고로 만들렴아, 저 숲처럼
내 잎새도 그 잎새와 같이 떨어지기로서 무엇이냐!
너의 힘있는 하모니의 커다란 소리에
나나 저아 같이 절절한 가을 노래를 내리로다,
적막은 하련만 아름다운 가을 노래를.
무서운 영이여, 내 영이 되라! 네가 나여라, 이 사나운 놈아!
내 죽은 시든 잎처럼 몰아, 몰아서,
우주사이에 휘날리어 새 생명을 주라!
그리하여, 부르는 이 노래의 소리로,
영원의 풀무에서 재와 불꽃을 날리듯이,
나의 말을 인류 속에 넣어 흩어라!
내 입술을 빌어 이 잠자는 지구 위에
예언의 나팔 소리를 외쳐라, 오, 바람아,
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?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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