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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상에서의 며칠/나태주

미진수 2011. 5. 18. 10:43

지상에서의 며칠/나태주

 

 

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 줌이었다가

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바람이었다가

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? 겨우

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

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

칭얼대는 파도 소리였다가

누군들 안 그러랴

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, 이런 저런 일들

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

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레었지

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

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

눈물이 고여서였을까? 눈썹

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…….

  

지상에서의 며칠

우리가

달빛 한 줌, 바람, 이슬비, 파도 소리,

빠알간 물감, 첫눈이였다가

금새 사라진대도

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

외칠 수 있었던 그 며칠이 행복이었지 않았을까

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만

그 모든 것, 눈썹 한 번 깜짝이면 사라질 것이거늘

 

우리가 사는 동안인 지상의 며칠은

적어도 100년 미만인 것이나

우주의 시간으로 치면 찰나인 것을

 

지상의 며칠은 우리가 겪는

작은 행복의 순간들이 아니겠는가

나답게 살아야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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